오랜 핑계

from text 2017/06/27 20:34
비가 내리니 네 마음 잠시 엿볼 요량으로 술병을 연다. 취기가 오르기 전에 그치면 어쩌나, 잔을 드는 손보다 마음이 바쁘다. 늘 그렇듯, 네 마음은 잘 보이지 않고 너는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인류를 사랑하기는 쉬워도 인간을 사랑하기는 어렵다고 했던가. 지구가 아름답지 않아도 우주는 아름다운 법. 이생이 비루하고 남루할지라도, 저생을 위해 손과 손에 붉은 실을 이을 일이다.

오늘은 모처럼 너를 만난다. 흐린 기억 가운데 또렷한 눈동자 하나. 거짓말처럼 비가 그친다.
2017/06/27 20:34 2017/06/27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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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몽 2

from text 2017/04/04 16:30
근교 어디 마당 조금 있는 집이면 좋겠다. 멀리 시외버스라도 한두 대 다니고 번잡한 마을이 아니면, 닭 몇 마리 키우고 한 두어 평 텃밭 정도는 가꿀 수 있을 게다. 어느 바람결에 가련한 소식이 전해지면 가끔, 아주 가끔 마누라나 첫사랑들이 제가끔 비린 생선이나 누린 고기를 손에 들고 찾아 주리라. 되는대로 뒹굴고 뒹굴다 다만 그날을 위해 됫병 소주로 술이나 담글 일이다. 하늘가에 한 줄 예쁜 문장이 걸리면 큰대자로 나자빠지기나 할 일이다. 늙을 뿐 병들거나 목숨이 다하지 않는 세상에서 말린 생선과 고기나 배불리 나눠 먹을 일이다.
2017/04/04 16:30 2017/04/04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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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아 불어라

from text 2017/02/20 10:32
겨우내 밤을 웅크려 짐승처럼 세상을 궁리하였다. 짧은 겨울잠인 듯, 긴 낮잠인 듯, 휑한 몰골에 두드러기만 남았다. 궁리한 세상이야 유통 기한 지난 필름처럼 기다림도 잊고 다만 거기 술집 어느 모퉁이에 들러붙어 있을 것이다. 아침 출근길, 사무실 앞 매화 석 점이 바람 속에 불꽃 같은 망울을 터뜨렸다. 다음은 조동진의 불꽃.

바람아 불어라 가만가만 불어라 나뭇잎 쌓이는
님 떠난 그 자리에 한 줄기 아름다운 불꽃을 피우자
바람아 불어라 가만가만 불어라 작은 새 날아라
해 저문 하늘 높이 한 줄기 아름다운 불꽃을 피우자
나는 보았네 사랑과 미움을 나는 보았네 저 불꽃 속에
나는 보았네 슬픔과 기쁨을 나는 보았네 저 불꽃 속에

* 반상사유, 2월 15일부터 한국기원에서 열린 제6회 지역영재 입단대회 참가를 끝으로 프로기사의 꿈을 접었다. 연착륙을 위한 서로의 약속을 지키는 것. 저나 나나 어찌 아쉬움이 없으랴만 나로서는 홀가분한 마음이 앞서기도 한다. 아무렴, 아마추어가 진짜다.
2017/02/20 10:32 2017/02/20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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