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계절

from text 2016/05/25 22:50
다른 계절이 오면 다른 꿈을 꿀 테다. 다른 세상을 맞아 다른 사랑을 꿈꿀 테다. 바람이 지난다. 바람 곁을 바람처럼 지난다. 오랜 옛날, 나는 내가 아니었다.

늦은 소식이 제 힘으로 제 소식을 만든다. 아무도 감응하지 않을지라도 혼자 소멸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아니다. 비가 내려도, 술을 마셔도 다시 만날 수 없다.

무엇이든 끝 간 데를 상상했다. 미웠던 만큼 마음을 다한 거다. 더는 알 길이 없다. 술을 먹고 나면, 우주에 나선 것처럼 사람들이 작고 예쁘게 보인다. 난데없이 눈물이 난다. 그래, 갈 길 없는 거다.

교복을 입은 큰아이를 본다. 독립된 인격체에 벌써 세월이 묻어 있다. 오월이 간다. 여름이 가고 지난날의 내가 가고 너와 나의 인생이 간다. 기억이야 무관하리. 온 데로 돌아가니 저어할 일 없어라.
2016/05/25 22:50 2016/05/25 22:50

봄이 진다

from text 2016/04/21 11:17
봄이 진다. 잊지 못할 사랑과 네 눈동자. 흔적 없이 사라지리라. 뿌리로 돌아가거나 떠난 가지를 그리워하지 않고,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부는 틈을 타 먼 곳으로 떠나리라. 적멸보궁으로 숨죽인 나비가 날았다. 그저 한때 나는 끈적이는 손으로 부푼 솜사탕을 탐한 것이었다. 가볍게 태어날 줄 몰랐고, 이렇게 세상이 흐를 줄 몰랐다. 이번 봄은 길었다. 너를 두고, 다시 오지 않을 봄이 진다.
2016/04/21 11:17 2016/04/21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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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농담처럼

from photo/D50 2016/03/05 14:53
입춘 지난 지 오래고, 사무실 앞 매화는 절반이 만개하였다. 오래된 농담처럼 나와 함께 성장하였던 금언. 무엇에든 구애되지 말자고, 마침 비오는 날을 잡아 한잔하였다. 어제, 금주 칠십일 일째.

술을 안 먹는 동안 농반진반으로 주위에 한 얘기가 있다. 이렇게 간절히 봄을 기다렸던 때가 있었나 하는 것과 가능한 한 길게 기록을 세워 다시 도전할 엄두도 못 내게 하겠다는 것. 가장 많이 생각한 건 아마도, 다시 술을 마신다면 천천히 조금씩 즐길 수 있을까, 여전히 잦은 폭음을 하게 될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조금씩 즐기되 그만한 일이 있는 어떤 날엔 대취하도록 먹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하곤 내심 좋은 생각이라고 쾌재를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다 곧 그것이 술을 마시는 동안 내내 했던 허튼 결심이었다는 걸 떠올리고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지만.

얻은 것도 있다. 파괴적으로 살지 말자는 다짐. 스스로를 갉아먹지 않아도 진실하고 충만할 수 있다는 깨달음. 아이들에게 본을 보이고 믿음을 얻었다는 것. 갈수록 엉망인 세태에도 세상이 조금 더 예뻐 보인다는 것. 아무튼 무거운 짐 하나 던 기분이다.

여럿 궁금해 하더라만, 술을 끊은 이유는 별 거 없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것. 뭐 다시 먹는 이유도 같다. 사진은 입학식이 있던 날 아침, 둘째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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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5 14:53 2016/03/05 14:53